이 짧은 에세이에서는 글쓰기의 수행성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내 전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질→양→질의 도식을 논의 전체에서 즐겨 썼다. 그리고 뒤에서는 이 두 가지 범주가 사실은 연속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글쓰기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 된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질→양(기호)→질(의미)의 도식의 대표적인 예시기 때문이다.

왜 양을 거쳐서 질에 도착하는가? 당연한 질문이겠지만, 전부는 아니더라도 아주 많은 것이 양을 경유해서 질에 도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실의 어떤 것을 찍은 영화를 보고 다시 해석한다. 마음 같아서는 급진적으로 모든 것은 양을 거쳐 인식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면 사회구성론자 내지 상대주의자가 아니라는 지리멸렬한 논의를 반성문 쓰듯이 제출해야 하므로 이 에세이에서는 잠깐 “대다수의 것”으로 우회하도록 하자.

토양

화이트헤드가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종교는 자신의 내적 고독으로 이뤄낸다고 말한 것 같다. 글쓰기도 그런 고독이 필요하다. 특히 에세이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유목적인 경험의 토대에서 나로 미끄러지는 경험들을 직물로 잘 번역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독은 여기에서 상자 역할을 한다. 이 상자 안에 응집됐다가 넘쳐 유출된 가느다란 아리아드네의 실을 잘 엮는 과정은 오로지 본인만이 해낼 수 있다.

위의 문단은 의도적으로 메타포를 과하게 엮어냈다. 다시 말해 글 외부의 맥락을 끌어와야 해석할 수 있는 문단이다. 저 짧은 문단을 이해하려면, 화이트헤드, 브라이도티, 그리스·로마 신화, 텍스트의 어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재적 관점은 그런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글을 읽는 행위 자체가 토양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을 경유할 때, 즉 글을 쓸 때 단순히 기호로 변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맥락이 축소됨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을 독자들이 데리다적 의미로 어떻게 보충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아니면 반대로 아주 벌어져 있는 차연을 만들어 텍스트라는 리좀적 네트워크 안을 어떻게 걸어가며 강도를 보충할지 독자에게 맡기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있다.

그렇다면 글을 쓴 나는 어떤가? “종교란 무엇인가”는 너무 옛날에 읽은 책이고 그때 노트가 사라져서 정확한 인용이 어려웠다. 하지만 난 그 책의 맥락을 알고 있고 고독의 뜻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다. 코드화되지 않은 유목적 강도, 이게 바로 토양이다. 즉 나는 저 문장을 인용할 때 단순히 책 자체의 기호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맥락까지 인용한 것이다. 나의 경험은 일인칭이고 고유한 사건이다. 수행적이라는 것은 모두 나의 토양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수행적이다.

글쓰기는 인용을, 글은 맥락을 경유한다. 그래서 글쓰기의 수행은 벤야민의 통찰처럼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이 인식된 시대에 해석의 현재성을 낙관적으로 던져놓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너무나 미끄러워서 모든 토양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글을 너무 작아서 토양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은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글은 현실적 힘을 지닌다.

꼬리를 경유하기

현실적 힘을 지닌다는 지나치게 텍스트의 힘을 외재적으로 확산시키는 본질주의로 읽힐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테제는 지금의 맥락에서 꼭 필요하다. LLM의 행위성을 거대한 천으로 잠시 덮어두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쓰기의 수행에서 기계와 공존하되, 기계가 점유할 수 없는 위상 공간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 나는 이 도약을 확률 분포의 꼬리에 있는 언어의 전유라고 말하고 싶다. 게토화된 언어, 잡종을 배재하는 언어, 순수화된 언어는 더 이상 언어가 아니다. 그건 생명력이 다한 사어다. 우리의 역할은 언어의 재배치되는 최전선에서 끝없이 무사유에 저항하는 것이다.

소수는 그것 자체로 중요하다. 어떤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소수를 다시 환원하는 것은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구체성의 오류일 뿐이다. 특수성이 희석되고 추상화돼서 보편적 가치로 프레이밍 되는 것, 시간성을 납작하게 압축하며 역사성의 깊이를 제거하는 것, 비대칭적 관계를 평평하게 환원하는 것 모두 문제다. 하지만 많은 진보적 담론이 이를 놓친다. 소수자-되기는 다수의 대칭적 부정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위상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소수성의 코드를 전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것이 기존 구조 안에서 해체가 아니라 외부로의 확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꼬리로 도망치기가 아니라 꼬리를 경유하자는 것이다. 보편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를 경유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양은 훌륭한 출발점이다. 토양은 보편적이면서 모두 다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이 토양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다시 말해 토양이 어떻게 재배치됨으로써 우리는 소수성을 경유할 수 있을까?

토양을 전복하기

생성이나 과정 철학에는 거대한 토끼굴이 있다. 생성이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내재성의 평면, 전개체적 퍼텐셜 등의 또 다른 준-초월적인 두 세계 이론을 도입해야 한다. 이런 순수한 기원을 상상하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자기모순적 결절을 암시하는 동일성의 폭력일 뿐이다. 보편성을 어떤 환원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사고 이전의 실재를 가정하든, 모든 객체 내부의 이중성을 만들던, 물질과 의미가 공동 구성된다고 말하던, 행위성이 분산되어 있다고 주장하던 우린 특정한 토양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토양의 위상적 차원을 뒤틀어 우리가 모두 진정한 토양을 경유하고 있지 않음을 폭로하고자 한다. 토양은 없고 우리는 평면적인 허공에서 사유한다. 단지 그 사유가 시간적 지연 때문에 재맥락화되면서 다채롭게 보일 뿐이다. 토양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의 환영이다. 빠르게 움직이며 매끈하고 보편적인 형태를 창출하는 물레보다, 더디게 더듬거리며 만들어진 지연된 형태가 더 가치 있다. 불안정한 운동을 견고한 토양인 것처럼 보이게 포장하는 가짜 환영을 포기하자. 우리가 도공이라면 이런 시간적 수행성을 긍정해야 한다.

글쓰기의 수행성은 토양이 아니라 허공에서의 불안정한 운동이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사유의 반복적 패턴이 빠르게 작동하면 마치 안정적인 형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안정한 운동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규범은 선언적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통해 사후적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어떤 윤리적 명령이 몇백 년 동안 수행적이지 않았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놀랍지 않게 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규범은 없지만, 지금-여기의 규범은 반복적 수행을 통해 실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확실성이라는 테제 위의 철학들은 모두 오류를 가지고 있다. 과거 자체가 현재로부터의 추론일 뿐 우리는 과거를 결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르코프 체인처럼 과거 상태를 역추적하는 것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불확실성을 가진다. 과거는 수행을 통해 소급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즉 생성은 없다. 재배치만 있다. 생성은 항상 이 재배치를 신비화해서 인식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이론적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 개념을 반복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그걸 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치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복도 먼 시간선에서는 반복이 아닐 수 있다. 반복은 대단히 준-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저항 자체도 내부로부터 수행의 균열에서 우연히 생산된다. 반복의 틈에서 새로운 개념이 출현하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 이런 반복의 수행성이 단절되고 저항의 흔적이 사라질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건 대단히 상식적인 낙관론이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기에 무의미하다가 아니라 반복은 끝날 수 있고, 다른 반복이 시작될 수 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목적론적인 진보 담론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에 있는지 이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토양 없는 사유로서의 글쓰기가 뭘까? 바로 지금-여기의 수행을 긍정하는 것이다. 고정된 토양을 전제하지 않고, 과거를 확정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반복을 안정적 패턴으로 가정하지 않고, 그저 지금-여기서 우연히 재배치하며 수행하는 것. 시계의 방향처럼 우연에 의한 고착화를 탈구하는 것. 우리의 글쓰기는 고정된 기반 없이 지금-여기에서 우연적으로 수행되는 언어의 불안정한 운동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