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발전은 용어 자체부터 허구성이 짙다. 어떻게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개발(development)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는 것인가? 빈곤, 성평등 등 윤리의 포장지로 열심히 감싸놨지만, 그 실체는 개발의 개발이라는 동어반복적 합리화일 뿐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추구하는 거시적 목표인 환경, 사회, 경제의 균형 추구는 필연적으로 유한한 자원을 소모하고 ‘지속 가능’이라는 용어와 명백히 대립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무한한 발전을 추구하는 게 아님은 알고 있다.)

물론 단기적인 지속 가능한 발전은 가능하다. 하지만 단기적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실천은 미래 세대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의 연속성을 고려했을 때 평가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여러 영역에서 재맥락화되며 마치 세계가 추구하는 영속적인 목표인 것처럼 과시된다. 이런 오도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회적 문제를 발전이라는 거대한 축으로 환원함으로써 얻는 이익의 중심에는 선진국이 있다.

SDGs을 예로 들어보자. 1992년 합의된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 CBDR의 환경 이외의 적용에 대해 선진국이 반발한 사례가 있다. SDGs 최종 문안 협상에 있어 ‘Ensure’을 ‘Promote’로 바꾸는 식의 어휘 희석은 선진국에서 꽤 흔하게 이뤄졌다. 이처럼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균형의 정의를 스스로 재규정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 담론은 글로벌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전제조건을 포함함으로써 경제적 분업의 토대를 정당화한다. 또 SDGs의 다양하고 상세한 실증주의적 세부 목표는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외부성 검토의 필요성을 흐린다.

물론 이러한 프레임워크를 통해 개선된 부분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개선이 잘못 해석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절대빈곤 인구는 2016년의 SDGs와 그 이전인 2000년의 MDGs에서도 하루에 $1.25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 정의된다. 그럼, 지표만으로는 이게 과연 빈곤이 해소된 것인지 단순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효과인지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SDGs의 거의 모든 성과는 단순한 지표로 표시되고 있다. 즉 성과가 통계적 편향으로 과대평가 된 것이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위의 단락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천에 따른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동기가 질적으로 대단해도 지속 가능한 개발은 실용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결과주의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해묵은 정언명령을 내세워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류의 대단한 공동 목표인 것처럼 포장하는 행위는 기만에 불과하다.

전체는 항상 사후적으로 당위성을 가지기 때문에 부분 간 인과관계를 가정해, 수단이 목적의 한 부분과 동일하다는 주장은 틀렸다. 목적의 가치는 부분들의 총합이 아니며 부분, 즉 수단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없다. 따라서 칸트의 선의지는 항상 옮으므로, 선의지가 의욕 하는 대상은 옮다는 명제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것으로, 외부와 유리된 사변적인 선은 존재할 수 없다. 의무론적 윤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전제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불균형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가장 낮은 층위는 개개인의 생활양식이다. 생명 정치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 정책은 일종의 사회 규제로써 작용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은 규범적인 공동체의 지향점을 나타내며 이는 개별 성원 간 공통 이익의 내면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SDGs를 포함한 기존 지속 가능한 개발 담론은 선진국의 하위 생활양식을 보장하기 위해 특정 자본 양식에만 초점을 맞춰 해소될 수 없는 간극의 재생산을 부추긴다. 다시 말해, 선진국은 허상 된 공통의 생활양식을 재정의하며 개발도상국은 뒤따라 지연된 생활양식을 수용하는 상황이 끝없이 연출된다. 즉, 생산양식의 불균형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생활 수준의 차이를 정당화한다.

전 세계적 식량 수요 증가에 따라 생명공학 기술 특히 유전자 변형 기술을 농산물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기술은 제3세계 국가들에 큰 도움이 되지만, 종자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선진국에 주어진다. 푸코가 말했듯 비평에 있어 강압 기제와 지식 요소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에 따라 해체해 보면 제1세계가 누리는 특권적 지위가 종종 생명공학과 같은 첨단 기술에 대한 통제력, 즉 기술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 권력은 때로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통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단순한 공적원조를 지향하는 선진국의 태도에는 기술 권력으로부터 배제가 은연중에 포함돼 있다.

상향식 투쟁

지속 가능한 발전은 글로벌 거버넌스에 의해 주도되는 하향식 방법론이다. 여론이 당파적으로 왜곡된 허상임을 브렉시트가 증명했듯이, 국가가 대의적으로 피력한 의사가 반드시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일치하라는 보장은 없다. 그 때문에 상향식 투쟁, 특히 무패가 말한 경합적 다원주의에 기초한 급진민주주의 등장이 필요하다. 지정학적, 문화적 조건에 의존적인 적대적 규범의 차원을 정치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국민에 의해 연속적으로 재정의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적인 보편성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적으로 이데올로기 독립적인 보편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어느 순간에 독립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개념, 즉 연속적인 개념이라 생각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이란 적대적 차원에서 코나투스적으로 확장하는 정적인 이데올로기부터의 도피다.

급진민주주의는 단순히 한 국가의 장 안에서만 통용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승리 이후 자유가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사회적 선택에 대한 책임이 분산됐고, 특정 엘리트 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적 질문은 개별 의사의 채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규범 속에서 항상 타자로 대변되어 온 우리는, (그게 과다노동으로 인한 정치 참여 제한이든, 정치 무관심이든 간에) 현존재와 실존적 위협의 분리를 당연히 여겨왔다. 대조적으로 기후 위기 등에 대한 직접적 감각을 정치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포퓰리즘 운동으로써 급진민주주의(대항해게모니)는 당면한 전 지구적 위기를 집합적 동일성 아래 실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생태정치학적 관점의 보편화가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다.

마무리

지속 가능한 개발은 그 의미가 다양하게 확정돼 모호한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그 모든 의미의 이면에는 개발을 긍정적으로 치부하는 이데올로기가 포함돼 있다. 탈개발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 수요의 증가를 단순히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작금의 방식은 지속 불가능함이 분명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혹은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의식적으로 선재해 있는 경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