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부록을 먼저 읽는 것을 권합니다1.
자유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학이 대안적 사회를 꿈꾸듯2, 퀴어 이론은 대안적 삶에 대해 말한다. 구체적으로 퀴어 이론은 정상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드러내고 그것이 내포한 취약성을 폭로함으로써 대안적인 경로를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멜빌의 ≪모비 딕≫3은 대단히 퀴어한 작품이다. 특히 에이해브의 광기, 퀴퀘그와 이슈메일의 관계성은 그 경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삶에서 교훈을 찾자는 것은 아니다. 교훈은 정상성의 표본이며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길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해브의 삶을 “복수는 나쁜 것”으로 환원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정상성에 포섭될 뿐이다. 대신 에이해브의 남성성이 광기를 매개로 어떻게 이탈하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야만족4으로 표상되는 퀴퀘그와 근대인으로 묘사되는 이슈메일 사이의 이질적인 배치가 어떻게 퀴어한 돌봄과 대안적 친밀성을 끌어내는지 알아보자.
사실 ≪모비 딕≫의 이러한 퀴어적 독해는 영미권에서 꽤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슈메일을 퀴어한 캐릭터로 해석한다든가5,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관계를 동성애적 로맨스로 가정하는 경우6가 흔히 보인다. 하지만 정작 공간에 내재한 퀴어성에 대해 다룬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나는 포경선이라는 공간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돌봄이 교차할 때 나타나는 퀴어함에 대해 뻔뻔하게7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다지 정형적이고 거창한 결론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이 바로 퀴어함을 퀴어하게 서술하는 방식이 아닐까?
본론에 앞서 이 글에서 특히 염두에 둔 퀴어 공간성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퀴어성을 평면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또 다른 환원이 될 수 있다. 특히 포경선이라는 육지의 공간적 질서—책 초반부에 등장한 예배당과 여관—로부터 이탈한 장소는 그 자체로 퀴어적인데, 이를 평면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따라서 공간도 퀴어적으로 독해하기를 제안한다. 공간을 실체가 아닌 규범의 수행과 반복으로 본다면8, 공간 자체가 퀴어함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규범으로서의 퀴어한 공간을 다룬다.
1: 돌봄이 꼭 이성애적이어야 하나?
거세와 남근은 과연 서양 문화의 심오한 대문자 진리들을 밝혀 주는가 아니면 현재는 이러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는 진실을 드러낼 뿐인가? 이따위 질문들이 명료하다 못해 심지어 설득력을 지녔다고 여기며 보낸 햇수를 생각하면 나 자신이 경악스럽고 창피하다9.
넬슨이 대문자 진리의 프레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듯, 우리는 돌봄이 꼭 이성애적이어야 하냐는 프레임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명료하다 못해 심지어 설득력을 지녔다고 여기며 보낸 이성애적 돌봄의 공식들—유아 돌봄, 돌봄 노동의 성비와 인식—은 사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규범적인 정상 가족의 틀 안에서 왜 여성이 항상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가? 모성애가 왜 당연한가? 그러한 믿음에 균열을 내는 장치로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대안적 친밀성10을 활용해 보자. 페미니즘이 돌봄을 당연하고 비가시적으로 만들었던—추상적 개인을 가정한—근대적 시민권에 의문을 품었던 것처럼, 퀴어 이론은 새로운 돌봄의 양태를 드러냄으로써 그들과 연대한다.
담배를 다 피우자 그는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비비며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이제부터 우리는 결혼11한 사이라고 말했다. (MD 110)
이마를 비비는 것은 친밀성을 표현하는 행위로 자주 등장한다12. 작중 그러한 행위는 퀴퀘그의 투사된 야만성13을 경유해 해석된다. 이슈메일은 그 야만성을 통해 혈연적인 정상 가족의 문법을 이탈하고, 이로써 새로운 돌봄 형태를 창출한다. 그것이 정상성을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관계더라도 “순박한 야만인에게는 그런 낡은 규칙은 적용되지 않을 터였다. (MD 110)”
이 돌봄에는 세즈윅의 동성사회성(homosociality)14과 명백히 구분되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허름한 물보라 여관에서 “누가 보았다면 내가 그의 마누라인 줄 알았 (MD 76)”을 자세로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다. 물보라 여관이라는—방이 없어 같은 침대에서 자야 하는—공간이 퀴어적 규범을 형성한 것이다. 퀴퀘그에게 결혼이란 필요하다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뜻이고, 실제로 그는 가진 은화의 절반을 양도15하기도 했다. 분명히 이러한 행위는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기대되는 돌봄을 초과하며, 여성을 경유하지도 않는다. 이슈메일이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퀴퀘그를 마주하며 “불가사의하게 끌리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MD 109)”던 것처럼 이 돌봄 관계는 불가사의하게 퀴어하다.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이웃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는 것—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런데 퀴퀘그는 내 이웃이다. / 따라서 나도 그의 예배에 동참해야 한다. (MD 111)
퀴퀘그는 이슈메일의 시선에서 어디까지나 이교도다. 이슈메일은 그를 존중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라마단” 기간에 그를 교정하려다 실패한다16. “종교의 중요한 측면은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이념적 변호를 제공하고, 기존 관습과 배치가 정당하고 공정하므로 복종 및 보존할 가치가 있음을 전달하는 것”17이다. 이슈메일이 자신의 종교를 일시적으로 이탈해 퀴퀘그와 함께 나무토막 경배에 참여하는 이 장면은 비관습적이라고 봐야 옳다. 이 이탈은 단순한 관용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이슈메일은 언제 종교와 관련된 규범을 재배치할까? 이슈메일은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라면서도, “종교가 /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MD 153)” 한편, 이슈메일이 퀴퀘그가 작살로 자살했다고 생각하고 긴급히 문을 여는 장면에서 종교에 대한 언급은 작품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한다. 대신 보다 인본적인 감정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퀴어한 친밀성이 그것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건 이슈메일의 종교적 입장이 퀴퀘그와의 구체적 관계 앞에서 물러난다는 점이다.
It’s a mutual, joint-stock world, in all meridians. We cannibals must help these Christians18.
자신을 조롱한 뒤 우연히 물에 빠진 사내를 구한 퀴퀘그를 바라보며 이슈메일이 논평하는 장면이다. 식인종이 기독교인을 도와야 한다는 재밌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종교는 달라도 도와줘야 한다는 맥락으로 읽어보자. 크게 주목할 대목은 아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 퀴퀘그와 이슈메일의 관계성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출생지도, 종교도, 외모도 전부 극적으로 다른 두 사람의 이질적 배치19에는 거창한 조건이 전제되지 않는다. 그저 세상 어디에서나 서로 도우며—관계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모비 딕≫에서는 거의 모든 캐릭터가 남성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공간—여성이 돌봄 제공자로 자연화되는 성별 각본이 아예 성립할 수 없는 조건—에서는 돌봄 받는 자와 주는 자의 성차적 위계가 희석되는 효과가 있다. 이처럼 이성애적 친족 구조가 전제하는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 공간에서 돌봄이 발생할 때, 그 돌봄이 친족의 규범적 경계를 넘어서며 양가적이고 퀴어한 돌봄 구조를 생산한다. 바로 이게 퀴어 공간성이 아닐까?
1: 끝내며
돌봄이 꼭 이성애적이어야 하나? 세 개의 짧은 단상에서 돌봄을 주제로 발췌한 ≪모비 딕≫의 장면들은 이미 답을 내린 것 같다. 그 장면들이 보여주는 것은 틀림없이 대안적인 돌봄 공동체다. 그것은 인종이나 종교의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되고, 결혼이라는 코드를 경유하며, 여성 매개 없이 성립하고, 기존 동성사회성 문법을 초과한다. 동성애나 이성애라는 단어가 생겨나기 18년 전20에 ≪모비 딕≫이 출판됐다는 사실을 잠깐 되짚어보자. 섹슈얼리티에 대한 공유지가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이 묘사하는 것은 동성애로도, 이성애로도 환원되지 않는 회색지대다. 그것이야말로 단어 그대로 퀴어한 것이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 여기서 도서관이 먼저일까 조용히 해야 한다는 규범이 먼저일까? 분명히 공간이 규범보다 앞서 있다. 이제부터 살펴볼 포경선이라는—이슈메일의 시각21에서 실체론적으로 사유되지 않는22, 가장 개인적이며 퀴어한—공간 또한 사후적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서 ≪모비 딕≫이 회고록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2: 포경선의 규범에서 수행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이탈
바다가 푸른 초목이 무성한 육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외딴섬 타히티가 있고, 더구나 그 섬은 절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삶의 공포에 둘러싸여 있다. (MD 395)
선박이라는 극단적으로 남성화된 공간에서 그 남성성이 포경선의 격리된 공간성으로 인해 어떻게 도리어 균열을 일으키는지, 선장 에이해브가 수행하는 위계적인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23을 경유해 알아보자.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특정한 시공간적 상황에서 형성되며, 변화에 열려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또 남성은 환경에 유동적인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코드들에 자신의 정체성을 맞추기 위해 남성성을 수행24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포경선의 공간에서 에이해브가 육지와 다른 어떤 코드를 참고하여 남성성25을 수행하는지 분석하는 것은 퀴어함에 대한 공간적 맥락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1장에서 논의되었던 돌봄에는 승선 이후 새로운 형태가 더해진다. 이 확장에 대해서도 남성성 수행에 기초해 다뤄보자.
이 선장실의 식사도 엄숙한 침묵 속에서 숙연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스터브가 플래스크보다 먼저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은 신성한 관습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MD 233)
이 단락은 포경선의 규범에 관해 가장 먼저 묘사되는 부분이다. 선장실이라는 공간은 식사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규범이 지배하는 곳으로 비친다. 무엇이 선장실에 들어온 항해사들을 “당장 꼬리를 내리고 공손하게 (MD 231)”만드는 걸까? 그리고 그 이후에 들어온 작살잡이들에게는 왜 이러한 규범이 적용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 공간성은 단순히 선장실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에이해브는 편집증적으로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MD 250)”며 모비 딕 잡기에 몰두하지만, “‘피쿼드’호의 원래 목적에 계속 충실해야 하며, 모든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MD 317)” 즉, 헤게모니적 위치에 있는 선장도 선박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미리 말하자면 공간이 위계를 생산하기에 헤게모니적 위치조차도 공간의 규범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을 해석하기에 앞서, 포경선이 어떤 공간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서 포경선은 공포로 둘러싸인 외딴섬 타히티처럼 고립된 공간으로 묘사된다. 나아가 네 번째 유언26을 적을 만큼 위험하며,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들고27, 1년이 넘도록 다른 배를 마주치지 못하는28 곳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수행되는 남성성은 필연적으로 육지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 시공간이 특정 남성성을 헤게모니적 위치에 놓기 때문이다. 동시에 포경선은 고프먼의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29과 같이 외부와 단절된 독자적인 규범 체계를 내부에서 생산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질문들은 사실 하나의 답으로 수렴한다. 선장실이라는 공간에 위계가 작용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위계를 생산하고 있다. 항해사들이 공모적 남성성(complicit masculinity)을 수행하는 것은 그들이 의도한 바를 초과한 “참을 수 없는 억압과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오만함 (MD 234)”을 선장실이라는 공간이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작살잡이들, 특히 퀴퀘그는 그 공간의 규범 체계에서 배제된 주변화된 남성성(marginalized masculinity)을 띤다. 마지막으로 총체적 기관인 포경선은 외부와 고립됨으로써 이 내부적 위계를 자연화한다. 선장실, 그리고 포경선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남성성의 위계가 매시간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장소인 것이다30. 그리고 버틀러가 말하듯 이러한 반복 속에는 항상 균열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 공간은 동시에 퀴어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백립잔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술잔에 담긴 뜨거운 액체를 항해사들이 들고 있는 작살 구멍에 가득 따라 넣었다. (MD 255)
에이해브는 자신의 복수를 승인받는 상황에서 이런 상징적인 행위들을 수행한다. 명백히 팔루스적 오브젝트인 작살을 세워서 들고, 구멍에 액체를 채운다는 구도는 확실히 섹슈얼한 코드로 읽힌다. 이런 팔루스적 상징성으로 환원하는 독해는 이미 충분하니 여기서 더 다루진 않겠다. 흥미로운 부분은 에이해브가 복수(複數)의 항해사들에게 이 행위를 반복하며 지배적 위계를 의례적 형식으로 형성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술의 코드는 육지와 다른 맥락으로 작동한다. 육지에서 공개적 음주가 남성 연대의 표식으로 작동31하는 것과 달리, 이 장면에서 술은 연대가 아니라 위계를 확인하는 매개물로 기능한다. 스타벅이 “저는 고래를 잡으러 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MD 250)” 라며 복수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앞선 장면 이후 “내 영혼은 굴복하여 노예가 되고 말았다 (MD 258)”며 읊조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여기서 에이해브가 술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분명히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다.
얘야, 에이해브가 살아 있는 한 앞으로는 선장실이 핍의 집이 되는 거야. (MD 694)
흑인 소년인 핍은 바다에 두 번이나 빠지고 구해진 뒤—마치 바다에서 타히티 너머 공포를 직시한 듯—광기에 이르게 된다. “동료 선원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 (MD 564)”했지만, 에이해브는 “큰 바보는 항상 작은 바보를 나무라는 법 (MD 693)”이라며 그런 핍을 곁에 두기 시작한다. 이는 포경선에서 이뤄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코드들 —냉철함, 통제, 위계—을 에이해브가 완전히 거부하는 순간이다. 스터브는 “네가 앨라배마에서 팔릴 값보다 고래 한 마리가 서른 배나 더 비싸게 팔린단 말이다. (MD 562)”라고 말하며, 포경선에서 경제적 합리성이 어떻게 돌봄을 비가시화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에이해브는 갑자기 대척점에 선다. 에이해브는 유일하게 핍을 품었을 뿐 아니라, 선장실을 공유하며 손을 잡고 내려간다. 이 장면에서 냉철함과 위계는 동시에 무너진다. 한편, 이는 어느 정도 선박의 규범을 지키던 에이해브가 이전과는 달리 완전히 광기에 사로잡히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이슈메일과 퀴퀘그 사이의 돌봄이 주변화된 남성성 간의 대칭적이고 상호적인 이질적 배치였다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지닌 에이해브와 그렇지 않은 핍 사이의 돌봄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하나는 강해서 미쳤고, 또 하나는 약해서 미쳤어 (MD 694)”라는 독백과 같이 이들 사이의 돌봄은 광기 그러니까 헤게모니의 균열과 이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핍과 에이해브의 관계에는 명백히 선원과 선장이라는, 그리고 흑인과 백인이라는 비대칭적 위계가 존재한다. 또 이 관계는 광기32를 매개로 한다. 에이해브가 핍과의 돌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 좀 불온한 이유—자기 광기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대안적 돌봄으로 볼 수 있을까? 돌봄의 형태가 꼭 상호적이어야 할까? 파괴적이고 광기 어린 이런 돌봄의 형태는 어떤가? 포경선이 외부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탈적 돌봄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러한 돌봄이 퀴어하다는 것이다.
2: 끝내며
여관에서 대칭적 친밀성이 나타난 것과 달리, 포경선에서는 헤게모니와 그 균열이 나타났다. 이는 공간이 퀴어성을 생산한다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다. ≪모비 딕≫의 배경인 19세기에는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이 여전히 첨예했고33, 작품에서도 자주 언급되듯이 골상학이라는 과학적 인종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시대적인 인종 질서를 넘어서는 이 돌봄이 포경선이라는 공간 속에서 가능했음을 분명히 한다면, 공간은 더 이상 제약이 아닌 대안을 창출하는 장으로 비친다.
1장에서는 이성애적 친족 구조 바깥의 돌봄에 대해서 다뤘다. 이는 대칭적이고 상호적이며 인종 그리고 종교를 가로지르는 돌봄의 형태였다. 2장에서는 헤게모니에서 이탈한 돌봄에 대해 다뤘다. 비대칭적이고 광기를 매개로 하는, 그래서 정상성을 되묻게 하는 돌봄이다. 두 장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돌봄은 이래야 해” 내지 “돌봄은 이런 것이야”라는 정상성의 각본을 우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비 딕≫이 묘사하는 대안적 삶은 완성되고, 단단하고,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 규범을 이탈하는 방식 그 자체다. 따라서 이 글의 결론 또한 열려 있다. 왜냐하면 대안이 구체적으로 주어질수록 기존 규범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대신 조금은 순수하고 뻔뻔한 결론을 던져보자. 나는 계속 대안적 삶을 상상해 보려 한다.
부록: 퀴어 공간성
이제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해보자. 포경선을 헤테로토피아로 볼 수 있을까? 물론 푸코는 “ship is the heterotopia par excellence”라며, 선박이 없다면 사회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질성은 여전히 공간의 구조적 위치에 빚지고 있다. 공간 이상의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공간으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을까? 공간이 아니라 공간이 만들어내는 규범에 집중해, 공간이 항상 표상이라고 보면 어떨까? 구성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공간의 실제성을 버리지 말고, 공간의 구체적 힘이 공간이 수행하는 규범들에 있다고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공간은 직접적 분석 대상이 아닌 것34이다. 분석 대상은 항상 규범이고, 그 규범들이 작동하는 양상이 공간성이다.
포경선을 총체적 기관으로 설명했을 때, 공간 자체가 아니라 단절이라는 조건이 규범을 자연화한다는 것을 보였다. 즉 공간의 물리적 조건은 필요조건에 불과하고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규범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장과 2장이 다른 퀴어성을 보여주는 것은 두 공간이 서로 다른 퀴어성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공간에서 작동하는 규범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 자체를 규범의 수행과 반복으로 본다면,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복수의 규범들과 그 균열을 포착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공간을 평면적으로 바라보면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른 수행을 위계적으로 억압할 수 있다.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물보라 여관에서 한 침대에 누웠을 때, 그 공간은 어떤 규범 아래 놓였는가? 또 오늘날 모텔은 어떤가? 나는 동성 애인과 모텔에 갈 때 여러 번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 예약된 것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입실을 방해하는 행위도 흔했다. 돌봄 행위가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모텔이라는 공간에서 이성애 커플의 수행은 정상으로, 남성 둘의 수행은 비정상으로 코드화되는 것은 모두 공간을 평면적으로 바라보면 생기는 일이다. 공간에서 수행되는 규범의 다수성을 인정하면 이성애 각본에 포섭된 모텔 독해를 조금이나마 탈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다수의 규범을 퀴어 공간성이라 부르고 싶다. 계속 규범에 관해 말했는데, 왜 퀴어 규범성35이 아닐까? 규범성이라는 말 자체가 정상성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소수자-되기를 말하면서 “되기”의 운동성에 중심을 두었던 것은, “소수자”가 도달 가능한 상태로 고정되는 순간 이미 다수자의 문법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규범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정상성에 포섭되어 버린다. 그래서 진정한 퀴어성은 정적인 규범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매끄러운 공간에서 작동할 때, 그러니까 정상성의 축에서 도주하는 되기를 수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장실의 식사 의례 등을 보면 포경선은 홈 파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 매끄러운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바로 거기에서 정상성의 각본을 벗어나는 생산이 일어난다. 또 그 지점은 퀴어 공간성을 퀴어 시간성으로 이끌기도 한다. 규범의 시간적 반복 가능성은 홈 파인 공간을 만들고, 바로 그 시간이 반복을 이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체론적 사고는 우리를 실체라는 하나의 관점에 가두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식의 비실체론적 공간 사유는 복수적 관점을 만들기 때문에 중요하다.
벗어나기가 정형화되면 결국 영토화가 일어나는데, 퀴퀘그의 결혼이 그렇다. 결혼이라는 코드로 퀴어함을 설명하는 순간 결혼 자체가 퀴어함을 영토화한다. 결혼은 정상성을 지닌 규범의 울타리에 둘을 포섭함과 동시에 퀴어한 친족-되기의 양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퀴어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면 안 되고 항상 표류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 그게 퀴어함이기 때문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36. 이는 시력이 안 좋아서 안경을 끼는데, 일관성이 있어야 하니까 다른 모든 곳에서도 보조장치를 사용할 정도로 장애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살짝 비틀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코드는 고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은 과거의 규범을 계속 인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매 순간 과거의 결혼을 지나치면서 약속한 규범을 새로 정립한다. 결혼이라는 규범이 시간적 지연과 반복을 통해 마치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결혼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규범의 고정은 반복적인 결과의 환영이지 과정의 실재가 아니다. 핵심은 근거 지음, 그러니까 결혼의 정의를 사회에 두냐, 아니면 개인에게 두냐에 따른 것이다. 결혼이 우리의 약속이라면 그 정의는 유동성에 취약하다. 하지만 사회가 정의 내린 결혼의 개념은 단단하고 이탈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결혼한 부부처럼”이라고 묘사될 때 그 개인적 관계는 매 순간 근거 지어지는 사건으로, 고정된 적도 이탈한 적도 없다. 여기서 “당분간”은 전략이 아니라 돌봄 각본을 따르지 않고 매 순간에 근거 지어지는 퀴어한 돌봄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이해브-핍이 대안적 돌봄인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때 그것은 사회적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므로 답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즉, 근거를 개인에게, 관계에게 그리고 순간에게 두는 방식이 퀴어한 것이다. 정상성이라는 거대하고 반복적인 준-안정적 사회적 기준을 이탈하기 때문에 퀴어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자기를 자기 자신에게 근거 지으면서 과거의 나로부터 비상관적이기 때문에 퀴어한 것이다37. 정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그 운동의 결과로 따라올 뿐이다. 즉 퀴어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A not A의 의존 구조가 없기에 퀴어한 것이다.
반대를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과거와 동일한 행위를 연속적으로 하며 사는 것은 전혀 퀴어하지 않다. 만약 10년 동안 매일 커피를 마셨고, 다음 10년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관성에 끌려다니는 것은 퀴어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비상관성은 이 관성을 막아서는 역할을 한다. 에덜먼이 말하는 미래주의적인 규범적 시간성을 탈구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이 비상관성은 항상 지금-여기에서만 작동하며,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내재적 차이를 긍정한다.
게이는 이성애에 의존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텀-탑의 성 역할 이분법부터, 삽입 섹스에 대한 양상, 그리고 정상적 남자에 대한 규범까지. 그들이 수행하는 섹슈얼리티가 모방적이라 할지라도, 게이 정체성을 단순히 섹슈얼리티로만 환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섹슈얼리티 이외의 것, 섹슈얼리티를 초과하는 돌봄을 모순되게도 나는 원나잇에서 찾았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관계가 끝난 후 대화를 몇 시간 나누다 보니 돌봄받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 돌봄은 사회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테니 퀴어한가? 아니 퀴어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돌봄은 그것을 느낀 비상관적인 스스로에 대해 퀴어한 것이고, 사회에 없다는 것을 사후에 발견해서 퀴어한 것이다. 마치 내가 ≪모비 딕≫을 끝까지 읽지 않고 매 순간 자기에게 근거 지으면서 이 글을 쓴 것 처럼 말이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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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의도적으로 선형적이게(항해하듯) 작성됐다. 즉, 본론의 내용과 인용을 철저히 ≪모비 딕≫의 흐름을 따라가며 작성했다. 또 마지막에 감상을 넣는 뻔뻔한 구조를 채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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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체제의 대안을 꿈꾸는 사회학이야말로 퀴어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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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줄곧 인용하는 모비 딕의 서지정보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MD로 인용한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Translated by 김석희, 작가정신,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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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멜빌의 오리엔탈리즘적 재현을 퀴어적인 독해로 이용하는 일종의 전략적 본질주의를 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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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dy, Ryan M. “Queering the Dick: Moby-Dick as Coming-Out Narrative.” Departmental Honors & Graduate Capstone Projects, no. 165,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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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er, Veronica. “Tied By Cords Woven of Heart-Strings: A Study of Manhood in Herman Melville’s Moby Dick.” WR, issue 2, Boston University Writing Program, www.bu.edu/writingprogram/journal/past-issues/issue-2/faller/. Accessed 13 Apr.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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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헌에서 퀴어함이 곧 뻔뻔함이라고 주장한다. 나도 이참에 뻔뻔하게 논지를 밀고 나가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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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공간 표상은 더 이상 실체적으로 존재하거나 지리적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신지영. 들뢰즈의 정치 사회철학. 그린비, 2023.). 여기에 더해, 수행과 반복은 버틀러와 들뢰즈의 교집합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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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와 남근, 팔루스는 퀴어 이론과도 접점이 있다. 이 에피그래프는 그 맥락을 고려해 선택했다. / 매기 넬슨. 아르고호의 선원들. 플레이타임,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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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논문에서는 대안적 친밀성을 가족의 대안적 방식으로서, “구체적 타자와의 의존이 상호수용되는 관계성의 창출과 유지”로 본다. 논문에서는 섹슈얼리티와 친밀권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마찬가지로 대안적 친밀성이 친밀관계에서 항상 섹슈얼리티의 코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어지는 서술에서도 퀴어한 돌봄과 대안적 친밀성을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 오영란, 강대선 “가족구조 변화와 지역공동체의 대안적 친밀성의 가능성에 관한 탐색적 연구: 부산 대안가족허브센터 사례 중심” NGO연구 16.3 pp.61-105 (2021) :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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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승선 이후 이슈메일은 고래 해체 작업 중 밧줄로 서로 연결된 상황에서도 “우리 둘은 당분간 결혼한 부부처럼 일심동체인 샘이었다 (MD 448)”라며 결혼을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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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퀘그는 나를 끌어안고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비비더니, 이윽고 등불을 불어 껐다. (MD 112)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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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성은 특히나 식인 풍습으로 묘사되는데, 식민지 담론을 통해 이질적 타자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와 거리두기를 하려고 “투사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재밌는 점은 남태평양 여성에 대한 서구의 성적 환상은 여러 연구에서 흔하게 등장하지만, 원주민의 야만성을 남성의 문란함으로 해석하는 인식론적 프레임은 드물거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멜빌을 독특한 지형에 위치시킨다. / Sturma, Michael. South Sea Maidens: Western Fantasy and Sexual Politics in the South Pacific. 2002. doi:10.5040/9798216016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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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사회성을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대신 이해를 도와줄 논문 하나를 인용한다. 이 논문은 동성사회성에 대한 훌륭한 개요를 제공한다. / 남미자, 박성태, 임세원 “웹툰에 드러난 남성 동성사회성(homosociality) 양상: 박태준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교육사회학연구 32.1 pp.31-58 (2022)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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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가 친족의 문제를 재산관계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Translated by 조현준, 문학과지성사,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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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퀘그, 제발 일어나서 좀 움직여봐. 이제 그만 일어나서 저녁을 먹어야지. 이러다가 굶어 죽겠어. 이건 자살 행위야, 퀴퀘그. (MD 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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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T. 조스트. 체제 정당화의 심리학. Translated by 신기원, 에코리브르,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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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이 축약이 심해서 원문을 가져왔다. 원래 번역은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는 서로 도우며 살고 있는 거야 (MD 122)” / https://americanliterature.com/author/herman-melville/book/moby-dick-or-the-whale/chapter-13-wheelbarr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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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배치라는 용어는 들뢰즈의 아쌍블라주를 의도한 것이다. 실제보다 관계가 선행한다는 테제를 유비적으로 사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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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동성애라는 단어가 인쇄물에서 최초로 등장했고, ≪모비 딕≫의 출판 연도는 1851년이기 때문에 18년이나 이르다. / Herzer, Manfred. “Kertbeny and the Nameless Love.” Journal of Homosexuality, vol. 12, no. 1, 1986, pp. 1–26, https://doi.org/10.1300/J082v12n01_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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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의 화자는 이슈메일이고, 살아남은 그가 기록을 남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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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비실체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이 물리적 공간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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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코넬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해 다루는 것은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대신 코넬의 논의에 대한 개요로 다음 논문을 인용한다. / Hopkins, Peter, and Andreas Giazitzoglu. “Hegemonic Masculinity: New Spaces, Practices, and Relations.” Progress in Human Geography, vol. 49, no. 1, 2025, pp. 8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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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하는 수행은 버틀러가 말하는 젠더 수행성과 연관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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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만의 남성성은 없다. 남성성은 단지 젠더를 체현하는 실천을 포착하는 개념으로서 수행될 뿐이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남성성의 실천이 의미를 획득하는 관계 속에서, 그 타인의 집합이 승선 이후처럼 매우 제한적이면 새로운 국면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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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와 똑같은 일을 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MD 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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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떠도는 무법자라고 할 만한 포경선에는 이 지구상의 어느 구석에서 나왔을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인종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MD 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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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는 1년이 넘도록 새 소식을 전해줄 다른 배를 한 척도 만나지 못한 채 외딴 해역에서 무모한 추적을 강행하는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MD 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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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의 공간을 총체적 기관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꽤 흔하다. 총체적 기관에 대해 포괄적인 개요를 제공하는 것 역시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따라서 다음 웹페이지를 인용한다. / https://ko.wikipedia.org/wiki/총체적_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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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의 한계로 다루지 못했지만, 여관에서 들었던 도망쳐 나온 스틸킬트 이야기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공간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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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남성 연구지만 어쨌든 ≪모비 딕≫ 선원의 대다수가 백인이다. / Peralta, Robert L. “College Alcohol Use and the Embodiment of Hegemonic Masculinity among European American Men.” Sex Roles, vol. 56, 2007, pp. 741–756, https://doi.org/10.1007/s11199-007-92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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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기가 인종 위계를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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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출판 14년 후 완전한 노예 해방이 이뤄졌다. / https://ko.wikipedia.org/wiki/노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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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물신화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공간을 조명하는 것은 공간을 단일한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복수성의 무언가로—마치 ANT의 테제처럼—볼 수 있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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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글 전체에 걸쳐 무언가 총체적인 형태를 띤 규범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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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난 반사회적 퀴어 이론들과 결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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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들뢰즈의 영원회귀 해석에서 영감을 일부 얻었다. 매 순간의 자기와 단절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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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적인 형식도 퀴어할 수 있다는 좋은 예시다. ↩︎